도데카니사 전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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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개요[편집]
1943년 9월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였고 그 지역은 모두 연합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. 그 중에서는 발칸 반도의 남부에 독일이 점거하고 있던 도데카니사 제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에 독일은 연합군에게 이양될 이탈리아군 병력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도데카니사 제도를 공격하는 작전을 시행한다.
2. 전개[편집]
3. 결과[편집]
애초 전투는 이탈리아 수뇌부의 갑작스런 항복과 이로인해 명령계통이 와해된 도데카니사 제도의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에게 긴급히 지원요청을 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, 전투에 참여한 영국군의 급조된 병력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. 그리스령에서 날아온 독일 공군기들에게 영국 해군 함정들이 다수 손실을 입고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에게 항복했으며 독일군의 피해는 1,100여명 수준이었지만 영국군은 4배가 넘는 5,0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. 이 때문에 처칠은 "또 갈리폴리냐"는 비판을 받았다. 그 결과 독일 괴뢰 정부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과 독일군이 도데카니사 제도를 1945년 패망 직전까지 지배했다.
또한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 지휘관이었던 이니고 캄피오니 제독은 살로 공화국과 독일측에 포로가 되었다. 그는 살로 공화국에서 협력 요청을 받았지만, 추축국과의 협력을 거부하였다. 결국 얼마 뒤 그는 반역죄로 사형당했다.
이 전역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 바로 소설, 영화 나바론의 요새이다.
여담으로 독일군의 유도미사일 Hs293이 투입된 전투이기도 하다. Hs293은 이 전투에서 영국 구축함 한 척을 격침시켰고 한 척에 손상을 입히는 전공을 세운다.
4. 기타[편집]
이곳에 배치된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의 무장해제에 응해 스스로 해산한 본토 사단들과 달리, 독일군과 협상을 거부하고 저항을 선택했다. 전투가 끝난 후 독일군은 적법한 절차없이 이탈리아군 장교와 사병들을 학살했고, 제33보병사단 아퀴가 주둔한 케팔로니아 섬에서는 그 피해가 컸다. 사단장 안토니오 간딘(Antonio gandin)을 비롯한 이탈리아군 장교 137명이 독일군에게 총살되었고, 약 장병 5천여명이 학살당한것으로 집계되었다.
1950년대 그리스 정부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추모비를 세웠다.아퀴 보병사단 학살사건.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코렐리의 만돌린이다.
한편 지휘계통상 학살 명령을 내린 하랄트 폰 히르슈펠트(Harald von Hirschfeld) 제98 산악병 연대장은 전쟁 중 전사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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